정약용, 서양 과학으로 조선을 밝히다 – 천문학 혁신의 여정
정약용, 서양 과학으로 조선을 밝히다 – 천문학 혁신의 여정
조선 후기, 쇄국과 봉건의 벽이 높았던 시대에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보통 정약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목민심서, 다산초당, 실학자라는 키워드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정약용의 진짜 위대함은 그가 조선의 지적 경계를 넘어서 ‘서양 과학’이라는 전혀 새로운 문물을 탐구하고 받아들이려 했던 데 있다. 특히 천문학, 그중에서도 ‘서양식 천문관’과 ‘기기(機器)의 도입’은 조선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혁신의 시작이었다.
▶ 유배지에서 시작된 호기심
정약용은 관직에 있을 때는 물론, 강진 유배 시절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다산초당의 소박한 방 안에서 그가 탐독한 것은 유교 경전뿐 아니라, 당시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양 천문학 서적들이었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저술·번역한 천문학, 수학 관련 서적들이 그의 연구 대상이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은 《명례집람》(明禮輯覽), 《혼천의설》(渾天儀說) 등 천문관측기기의 작동 원리, 《서양기하원본》(西洋幾何原本, 즉 유클리드 기하학), 서양력법(曆法) 등을 적극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조선식 천문학이 가진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 왜 ‘서양 천문학’에 주목했는가
정약용이 서양 과학, 특히 천문학에 주목한 배경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관상감(觀象監, 천문·역법 담당 관청)의 천문·역법 체계가 실제 하늘의 움직임과 맞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기존의 조선식 역법(중국에서 들여온 원나라·명나라식 역법)은 태양·달의 실제 운동과 오차가 컸고, 이로 인해 농사력과 국가의식에도 차질이 많았다.
정약용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관측하고 예측할 수 있는 서양식 기기와 계산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사회가 ‘중화(中華)’ 질서만을 따르는 한계에 갇혀 있음을 비판하면서, “과학은 진리이기에 어디서 왔든 받아들여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 천문기기, 역법의 실질적 개혁 구상
정약용은 중국에 파견된 사신단(연행사)이나 유교·천주교 신자 네트워크를 통해 입수한 최신 천문도, 천문기기 도안, 수학적 계산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천문관측기기인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간의(簡儀) 등의 구조와 원리를 분석했고, 이에 서양식 구면기하학과 삼각법(三角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탐구했다.
정약용은 자신이 해석한 서양식 역법 원리와 조선식 역법을 비교하여, 조선의 공식 역법 개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기기도설》(機器圖說)이나 《시헌력서》(時憲曆書) 관련 논고 등은 ‘실제 하늘의 움직임에 더 맞는 계산 체계’를 만들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천문은 국가 경영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천문과 역법은 농사, 세시, 제사, 국가 행정 등과 직결된 분야였기 때문에, 천문학의 정확성은 국가 운영의 핵심이기도 했다.
▶ 서양 과학의 철학적 수용과 비판
정약용은 서양 과학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유교적 가치와의 접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는 ‘기(氣)’와 ‘이(理)’의 조화, 즉 자연의 원리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 서양 과학의 객관성과 실증성에 큰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적 지식이 인간 사회의 도덕·질서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한계의식도 지녔다.
천주교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 우주관(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에 대해서도 정약용은 열린 태도를 보이면서도, 조선 사회에서의 실천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 고민을 이어갔다.
▶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과 그 유산
안타깝게도 정약용의 이런 혁신적 시도와 주장은 현실 정치의 벽, 유교적 질서의 강고함, 천주교 박해 등으로 인해 조선의 공식 천문학 체계를 바꾸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글과 아이디어, 도안, 천문관측 기록 등은 후대 실학자, 그리고 개화기 초기의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의 천문학 혁신 시도는 그저 학문적 실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을 바꾸는 실질적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학문은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할 때 진짜 쓸모가 있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과감히 새로운 지식, 특히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적용하려 했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정약용이 천문학, 나아가 서양 과학을 받아들여 시도한 혁신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세계와 지식, 기술,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용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그의 태도는 ‘비판적 수용’, ‘창의적 적용’, ‘실용적 활용’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정약용은 단순한 실학자, 행정가, 개혁가가 아니었다. 그는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진리를 찾아 끝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태도”로 조선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혁신가’였다. 그의 도전정신과 열린 시각은 지금도 변화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