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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회룡사, 폐허를 견딘 사찰

지식 버스커 2025. 10. 1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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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회룡사, 폐허를 견딘 사찰

폐허 속에서도 불빛을 지킨 산사(山寺)의 이야기

 

경기도 의정부와 양주 인근 북한산 줄기 아래 자리한 회룡사(回龍寺)는 고려와 조선 시대 왕실의 기도처로서 번성했지만, 20세기 한국전쟁이라는 격난을 겪으며 큰 상처를 입었다.

 

많은 사람이 회룡사를 단순한 기도 사찰로 기억하지만, 이곳에는 전쟁과 폐허를 견딘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도 함께 남아 있다.

 

한국전쟁과 회룡사, 폐허를 견딘 사찰

🔥 1. 1950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들어간 사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도봉산과 북한산 일대는 격전지가 되었다.

회룡사가 위치한 지역은 군사 요충지였던 만큼 남북 양측이 번갈아 점령하며 치열한 교전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각 일부가 소실되었고, 사찰은 더 이상 수행의 공간이 아니라 피난민과 부상병의 임시 은신처로 변했다.


🧍‍♂️ 2. 승려와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다

전쟁 중 회룡사는 산으로 향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한 공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쟁 당시 승려들은 절을 떠나지 않고 부상병에게 물을 건네고, 어린아이를 숨겨줬다는 전언이 전해진다.

종소리가 멈춘 사찰에서 들린 것은 범종이 아니라,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숨죽이는 기도였다.


💣 3. 폭격과 방치, 회룡사의 침묵의 세월

전쟁 후 회룡사에는 남겨진 전각과 파괴된 터만이 남아 있었다.

석축은 무너지고 나무 기둥은 탄 자국을 품은 채 서 있었다.

특히 오래된 불화와 경전 일부는 불길에 사라졌고, 일부 유물은 전쟁 중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회룡사는 역사적 사찰로서의 기능도, 종교적 기능도 잃은 채 방치되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국전쟁과 회룡사, 폐허를 견딘 사찰

 

🛕 4. 복원 아닌 ‘되찾기’ – 1960~70년대 재정비

1960년대에 들어서며 회룡사는 천천히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돌아왔다.

불교계와 지역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사찰 재정비가 시작되었고, 소실된 전각들은 하나둘씩 재건되었다.

완벽한 복원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상흔을 품은 채 다시 기도를 받아들이는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은 단순 복구가 아니라,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한국 불교의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 5. 전쟁을 넘어선 현재, ‘기도보다 치유의 사찰’

오늘날 회룡사를 찾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한국전쟁의 잔흔을 모르고 지나간다.

그러나 세월이 덮지 못한 돌계단과 오래된 석축은 조용히 증언한다.
회룡사는 더 이상 비극의 현장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누군가는 기도하러, 누군가는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 6. 회룡사에서의 종교적 의미

회룡사는 태조 이성계의 기원처이자 비구니 선원으로 유명합니다.

사찰 내에 관음보살상이 봉안된 것은 다음과 같은 종교적 의미를 갖습니다.

  • 중생 구제의 염원: 관음보살은 '일체중생의 어떠한 어려움도 구제해 주는 보살'로, 자비를 상징합니다. 특히 전란과 혼란이 잦았던 조선 초중기에, 이 관음보살상은 백성들의 평안과 구원에 대한 강력한 염원을 담고 있는 상징물이었을 것입니다.
  • 비구니 수행의 중심: 현재 회룡사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 공간으로 기능하는 만큼, 관세음보살의 여성적이고 자애로운 이미지는 사찰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신도들의 신앙심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 역사의 폐허 위에 서 있는 평화의 사찰

 

회룡사는 화려한 역사를 가진 대사찰은 아니지만, 무너져도 떠나지 않았던 산사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사찰, 그리고 오늘도 묵묵히 사람들을 맞이하는 이곳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시간은 흐르지만, 자리를 지키는 것이 곧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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