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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한글 창제의 위대한 서막

지식 버스커 2025. 9. 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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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한글 창제의 위대한 서막

1446년은 조선의 역사,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해입니다. 이 해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세종대왕의 깊은 애민정신과 치열한 학문적 노력이 빚어낸 이 위대한 유산은 단순한 문자를 넘어, 모든 백성이 지식을 얻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한글 창제의 위대한 서막

 

당시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지식의 전달은 오직 한자(漢字)를 통해서만 이루어졌습니다. 한자는 배우기 어렵고 복잡하여, 양반 사대부와 소수의 지식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할 수 없었고, 나라의 법령이나 교훈을 이해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식의 독점과 신분 간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 창제, 모두를 위한 위대한 도전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이러한 어려움을 깊이 헤아렸습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 창제는 이러한 그의 애민정신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시 주류 지식층인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중국에 사대하여 한자를 쓰는 것이 당연하며,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의 짓"이라고 비판하며 국시(國是)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백성을 향한 확고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하며,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등 젊고 재능 있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소리를 흉내 내는 문자가 아닌, 발음 기관의 모양과 음양오행의 원리까지 담아낸 과학적인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이처럼 한글 창제는 단순한 언어학적 업적을 넘어,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백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던 지배층의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한글, 역경을 이겨낸 불멸의 유산


훈민정음은 창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연산군 시대에는 '언문(諺文)'이라는 멸시적인 이름으로 불리며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말 말살 정책에 의해 그 존재 자체가 위협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한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국어학자들은 목숨을 걸고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은 한글을 민족의 얼을 지키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를 넘어, 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지키는 굳건한 정신적 기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로운 소통과 지식의 확산은 모두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훈민정음 창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수천 년간 쌓아온 우리의 지혜와 역사를 온전히 기록하고 전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글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결코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유산입니다.

 

우리말과 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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