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실과 이성계 – 충성과 경계, 그리고 역사의 전환점
한국사에서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건국의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오롯이 ‘조선의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뿌리와 정체성 상당 부분이 바로 고려 왕실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성계의 삶은 철저히 고려의 틀 안에서 성장했고, 그의 운명과 결정적 선택 역시 고려 왕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본 글에서는 고려 왕실과 이성계의 관계를 정치, 혈연, 사회적 맥락까지 다층적으로 들여다본다.
1. 이성계는 철저한 ‘고려의 무장’이었다
이성계가 태어난 1335년은 고려 후기, 즉 원 간섭기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그의 가문은 함경도(당시 동북면)에서 대대로 군공을 세운 무장 가문으로, 원나라와 고려 양쪽 모두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 역시 원나라의 관리이자 고려의 무장이었다. 이 때문에 이성계 가문은 ‘고려인이자 원나라의 신하’라는 중첩된 신분 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궁궐이 아닌 변경에서 군사훈련과 무인 생활을 하며 성장했다. 당시 고려 왕실은 몽골-원나라와의 관계로 인해 왕권이 흔들렸고, 각 지역 호족과 무장들의 힘이 커지고 있었다. 바로 이 틈새에서 이성계 가문은 군사적 실력을 바탕으로 고려 조정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 고려 왕실과의 혼맥 – 정략결혼과 충성의 증표
이성계의 정치적 입지는 혼맥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성계는 조선 건국 이전, 이미 고려 왕실과 두터운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는 고려 고위 관료 집안 출신이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왕비로 인정받았다. 이 외에도 이성계 가문과 고려 왕실·귀족 가문들은 복잡한 혼맥을 통해 상호 견제와 협력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혼맥은 단순히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의 증표이자 조정 내 입지 강화의 핵심 수단이었다. 고려 말기, 왕실은 외척과 무인세력의 힘을 균형 맞추기 위해 ‘왕실과 유력 가문 간의 혼인’을 적극 장려했다. 이성계 가문 역시 이 구조에 충실하게 편입됐으며, 왕실 행사, 혼인, 장례 등 주요 의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3. 충성과 경계, 이성계의 두 얼굴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고려 조정의 핵심으로 성장한 것은 우왕, 창왕, 공양왕 대에 이르러서다. 특히, 왜구 격퇴와 홍건적 토벌 등에서 이성계는 왕실의 ‘충성스러운 장수’ 이미지를 굳혔다. 그에게 내려진 각종 관직, 작위, 포상은 그가 명실공히 고려의 ‘국가대표 무장’ 임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충성의 이면에는 끊임없는 경계와 정치적 계산이 존재했다. 왕실 역시 이성계를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다. 우왕과 신돈 세력, 나중의 이인임 등은 이성계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며 인사권, 군사권을 제한하려 했고, 이성계 역시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다시 손을 맞잡는 미묘한 긴장관계가 지속됐다.
4. 위화도 회군과 고려 왕실과의 결별
1388년, 운명을 가르는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다. 이성계는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를 둘러싸고, 요동 정벌을 명분 삼아 출정한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돌연 회군’을 감행하며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는 겉으로는 국가의 안위와 백성 보호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고려 왕실과의 ‘최종 결별’을 의미했다.
이성계는 회군 후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차례로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으로 공양왕을 추대했다. 표면적으로는 ‘고려 왕실의 적통 계승’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신흥 권문세족 및 신진 사대부와 손잡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 시기, 고려 왕실의 왕족과 이성계 측 신흥 세력 간의 긴장과 불신은 극에 달했다.
5. 공양왕과의 마지막 동행—마침내 ‘왕조 교체’로
공양왕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실질적으로는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 세력의 허수아비였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통해 ‘왕조의 명맥’을 한동안 유지하며, 정치적 불안정과 민심의 동요를 최소화했다. 하지만 공양왕 역시 조정의 실권자였던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 세력을 끝내 견제하지 못했고, 결국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허용하고 만다.
공양왕이 폐위되며 고려 왕실은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많은 왕족과 왕실 출신 인물들은 조선 초기 관직에 등용되거나, 때로는 유배, 숙청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 역시 고려 왕실과의 마지막 ‘정리’를 신중하게, 그리고 때론 냉혹하게 진행했다.
6. 고려 왕실과 이성계, 그 복잡한 유산
이성계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단순한 ‘충성에서 배신으로의 전환’이 아니다. 이는 시대 변화 속에서 구질서와 신질서가 충돌하고, 각자의 생존 방식과 새로운 세력의 명분이 치열하게 충돌한 과정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뿌리와 정체성 상당 부분은 ‘고려인’이었고, 고려 왕실과의 복합적인 감정과 정치적 고민 역시 계속됐다.
실제로 조선 개국 초, 태조는 ‘고려 왕실의 명맥’과 ‘고려 충신’에 대한 예우 정책을 병행했다. 이는 자신이 새로운 왕조의 창업자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 역시 ‘고려 왕실이 만든 무인’임을 인정하는 모순된 태도였다.
결론 –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다
이성계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한국사에서 왕조 교체가 얼마나 복잡한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이성계는 결코 단순히 ‘고려를 배신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고려라는 토양에서 성장했고, 고려 왕실의 인정을 받아 그 위치에 올랐으며, 결국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조선을 세웠다. 그의 삶과 선택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 배신이 아니라 시대의 필연적 전환이었다.
역사를 볼 때, ‘누가 옳았는가’보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진짜 의미를 찾는 길이다. 고려 왕실과 이성계의 관계는 그 점을 보여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