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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의 발해 건국과 천문령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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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의 발해 건국과 천문령 승리

698년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동북아 질서에 중대한 변곡점을 남긴 해다. 나·당 전쟁의 종결(676) 이후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통일 왕권을 세우는 사이, 옛 고구려와 말갈 세력이 결집해 대조영을 중심으로 진국(震國), 뒤에 발해(渤海)라 불리는 국가를 세웠다. 바로 이 건국의 분수령이 된 전투가 천문령 승리이며, 698년의 핵심 장면이다. 발해의 성립은 단순한 신생 왕조의 탄생이 아니라, 외세의 압박 속에서 자주와 연대를 통해 북방의 정치 지형을 재편한 사건이었다.

“삼국통일의 완성은 남쪽의 신라만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 성립까지 보아야 한다.”

대조영의 발해 건국과 천문령 승리

 

 

1) 698년의 현장: 천문령에서 열린 길

고구려 멸망(668) 이후 만주 일대에는 당나라의 군정과 거란·말갈·여러 부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옛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은 각각의 생존 기반을 찾아 흩어졌고, 일부는 당의 기미 체제 아래 편입되었으며, 일부는 독립적 세력으로 성장할 기회를 노렸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대조영(고왕)이다. 그는 고구려 유민과 여러 말갈 집단을 규합해 동모산 일대로 이동하며 독자 세력권을 일구었다.

698년, 당과 거란의 추격을 피하던 대조영 일행은 요동에서 북상해 천문령 일대에서 결전을 벌였다. 당시 당군은 요동 방면 질서를 재편하려 했고, 거란 세력 또한 만주 서부로 확장을 노렸다. 그러나 대조영은 지형을 활용한 기동으로 적의 장거리 보급을 흔들고, 다양한 계통의 기병을 혼합 운용하여 전열을 무너뜨렸다. 이 승리로 대조영은 일시적 도피가 아닌 정면 돌파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곧이어 진국 선포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2) ‘진국’에서 ‘발해’로: 이름이 말하는 정체성

건국 초기 국호는 진국이었다. 이는 새로이 울림을 주는 나라, 즉 열강 사이에서 독자적 울림을 내는 주체임을 상징한다. 이후 대외 교섭과 내부 체제 정비가 무르익으면서 국호는 발해로 정착했다. 발해라는 이름에는 동북아 해역 네트워크에 대한 자의식과 북방 종합 세력이라는 성격이 담겼다. 이는 단순한 산악 국가가 아니라, 해륙 복합권을 지향하는 전략적 정체성이었다.

정체성 면에서 발해는 고구려 계통말갈(말갈 여러 부락)이 결합한 복합 국가였다. 정치 엘리트와 군사 조직은 고구려의 관제와 전통을 계승한 비중이 컸고, 변경 방어와 기동력의 근간에는 말갈 기마·사냥 문화를 바탕으로 한 전투력과 개척력이 배어 있었다. 이 연합의 기술이야말로 발해가 혹한의 북방에서 국가를 설계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발해의 성립은 패배의 잔여가 아니라, 흩어진 민과 부족을 다시 묶어 세운 재건의 기술이었다.”

 

3)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발해 병존 체제로

7세기 후반의 동아시아는 당 제국의 팽창과 그 반작용, 즉 주변 세력의 자주적 틈새 만들기가 교차하던 시기였다. 신라는 676년 이후 나·당 전쟁을 수습하며 한반도 남부의 안정과 제도화에 집중했고, 발해는 698년 이후 만주와 연해주 방면에서 북방 네트워크를 조성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와 만주에는 남쪽의 통일신라, 북쪽의 발해라는 병존 구조가 형성되어, ‘남북국 시대’의 토대가 놓였다.

이 병존은 단절이 아니라 상호 긴장과 교섭의 연속이었다. 국경에서의 마찰과 대사(大使) 파견, 상인과 유민의 이동, 불교 및 도교 요소의 교류가 동시에 진행됐다. 신라의 관제와 불교문화는 남쪽에서 고도화되었고, 발해는 북방·해상 교역로를 통해 금·수모피·말·인삼·철제 등 전략 물자를 유통하며 독자적 번영 기반을 닦았다.

 

4) 천문령 승리의 군사·정치적 의미

군사적으로 천문령 승리는 소수 정예의 유동 방어와 기동 타격이 결합된 전형을 보여준다. 산악·협곡 지형을 활용해 장창·궁노·경기병을 분산 배치하고, 추격군의 종심을 끊어 놓는 방식이 유효했다. 보급로를 길게 늘인 적에게는 측후(側後) 교란이 결정적이었다. 전략적으로는 패퇴가 아닌 주도권 전환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난민·유민 집단을 국민으로 재조직하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승리 직후 대조영은 핵심 세력을 동모산 일대로 모아 치소를 마련하고 왕호와 관제를 정비했다. 고구려식 군사조직과 북방 기동 전력을 혼합한 체제를 유지하되, 변방 부족장에게 자율·책임을 배분해 공동 방어망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외부세력의 개입을 줄이고 내치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5) 숨은 주역들: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집단

건국 서사에서 대조영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전의 현장에서 군단을 움직이고 주민을 이주시킨 무명 지휘관·여성·장인·수로 전문가들의 기여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다. 강을 건너고 늪지를 통과하는 북방 이동에는 말 발굽을 보호하는 장인, 썰매·전차를 수리하는 기술자, 보급을 책임진 여성 공동체의 노동이 필수였다. 또한 말갈 여러 부락의 사냥·추적 전술은 산악 매복과 야간 급습에서 결정적 효과를 발휘했다.

또 다른 핵심은 통역·서리(書吏) 집단이었다. 고구려 잔존 관료 출신과 승려·도사들은 당의 문서 양식과 불교 네트워크에 밝았고, 이들이 외교문서를 기초하고 사절단의 의전을 수행했다. 국가의 겉모습을 갖추는 일은 칼끝 못지않게 서류와 의전의 힘에서 완성되었다.

 

6) 주변국과의 갈등·교섭: 당·거란·돌궐·일본

발해의 북방 전략은 당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도 국경 방위를 강화하는 완충·탄력 정책에 가까웠다. 거란의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때로는 교전, 때로는 완충 지대를 유지했다. 서측의 돌궐, 동측의 해상로를 통해 우회 교역을 확대함으로써 당의 경제적 압박을 분산시켰다.

대외 교섭에서 주목할 부분은 일본과의 통상·외교다. 발해는 자국을 고려(高麗)의 후예라 칭하는 문서를 보냈고, 일본은 발해를 독립된 해상 교역 파트너로 인정했다. 사절단 교류는 상징 정치를 넘어, 선박·항로·항만 기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이 과정에서 남쪽 신라와의 긴장도 존재했지만, 동북아 해상 질서는 다층적으로 연결되었다.

 

7) 제도와 문화: 고구려 계승과 북방 혁신의 결합

관제는 고구려 체계를 모태로 삼되 북방 현실에 맞게 조정되었다. 경·부·현 체계와 군현 관리, 국경 방면의 장관(將官)에게는 군정(軍政) 복합의 권한이 주어졌다. 토지의 경우 경작 가능지가 한정되었기 때문에 목축·수렵·교역을 균형 있게 묶는 다각 생산 방식을 유지했다. 이는 농업 중심의 남방 국가와 다른 경제 구조였다.

문화에서도 고구려의 벽화 미감과 불교 신앙이 이어졌고, 말갈 고유의 무구·장신구·가죽 공예가 합쳐져 북방 특유의 실용·장식미가 출현했다. 사원의 배치와 왕릉 양식은 남방과 달리 방어·기동을 고려한 형태로 변주되었다. 훗날 문왕 대에 이르면 도읍을 상경 일대로 옮기며 대도시 계획과 율령 정비가 본격화되는데, 그 밑바탕은 698년 이후의 초창기 축적에서 비롯한다.

 

8) 역경 스토리: 패망의 잔해에서 국가로

발해 건국의 본질은 패망·유민·이주라는 난관을 국가 형성의 자원으로 바꾸어낸 데 있다. 생활 기반을 잃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고, 다양한 배경의 집단을 공동 방위와 교역 이익으로 묶어낸 정치적 설득이 핵심이었다. 냉혹한 자연환경, 장거리 이동, 외세의 압박 속에서 지속 가능한 거버넌스가 성립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국가 운영에도 많은 함의를 던진다.

특히 698년은 상징적이다. 천문령 승리는 군사적 승전보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전환점이었다. “우리는 다시 국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은 민심 결집과 재정·군정 동원의 추진력으로 이어졌다.

 

9) 조선·고려로 이어지는 긴 계보

발해는 9세기 이후 거란(요)에 밀려 926년에 멸망하지만, 그 영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로 건너왔고, 일부는 대광현과 같이 고려 지배층에 편입되어 제도와 문화, 기술을 전승했다. 고려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으로 규정하면서도, 북방 개척과 대외 교섭에서 발해 경험을 간접적으로 흡수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북방 경계의 인식과 여진·후금과의 관계에서, 만주 공간을 둘러싼 기억은 긴장 속에 남아 있었다. 지리지·지도 제작·사행 기록은 잊히지 않은 북방의 흔적을 보여 준다. 즉, 698년의 발해 건국은 고려·조선을 관통하는 북방 인식의 뿌리이기도 하다.

 

10) 일제강점기: 왜곡과 복원의 싸움

근대에 들어 일본 제국은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반도의 역사 공간을 축소하고, 만주와 발해의 역사를 분리·단절하려 했다. 발해는 때로 ‘변방 부족국’으로 묘사되거나, 조선과 무관한 타자화의 대상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국내 학계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고구려·발해의 연속성을 재조명하며, 분절 서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학교 현장에서도 남북국 인식은 일제 강점기의 왜곡을 넘는 서사 복원의 과제였다. 발해를 단순한 주변 왕조가 아닌, 동북아 네트워크의 핵심 주체로 이해하는 시각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1) 근현대의 교훈: 위기 대응과 다층 네트워크

20세기 이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분단·산업화·민주화의 굴곡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개방형 네트워크연합의 기술이 위기 극복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발해 초창기의 교훈—해륙 복합 전략, 완충 지대 운영, 다민족 통합 거버넌스—은 공급망 재편과 안보 복합위기 시대의 정책 설계에도 시사점을 준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고도성장은 “백절불굴”이라는 정신사적 자산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였다. 북방의 혹한과 장거리 보급 난제를 기술·조직으로 극복했던 698년의 경험은, 오늘날 디지털·에너지·안보의 복합 인프라를 조율하는 능력과 닮아 있다.

 

12)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 비하인드

  • 수도·빙로(氷路) 운용: 겨울 강을 건너는 빙상 이동은 기동 반경을 넓히는 동시에 보급로를 단축시켰다. 이 기술은 사냥·목축 문화의 생활 지식과 군사 운용이 결합한 결과였다.
  • 의전과 문서: 발해 사절단은 당의 서식과 의전을 이해하면서도, 국호·왕호 표기에 자주성을 담아 협상 레버리지를 확보했다.
  • 여성의 역할: 장거리 이주와 정주 과정에서 식량 가공·피복 제작·치유·의례를 담당한 여성 공동체는 보급의 심장이었다.
  • 경계 공동체: 변방 촌락은 수렵·채집·교역이 맞물린 복합 생태였다. 이들이 제공한 정찰·가이드·말 관리가 국경 방어의 현장 지식이었다.

 

13) 핵심 메시지 정리

  • 698년의 의미: 천문령 승리를 계기로 진국(발해)이 성립, 남쪽 신라와 병존하는 남북국 구조의 출발.
  • 역경 극복: 유민·말갈·장인·여성 공동체 등 다양한 집단의 협업이 국가 형성의 동력.
  • 주변국과의 관계: 당·거란·돌궐·일본 사이에서 완충과 교역의 다층 전략.
  • 현재와의 연결: 개방 네트워크·연합의 기술·해륙 복합 전략은 현대 한국의 위기 대응 DNA와 통한다.

 

▶ 맺음말

698년 대조영의 발해 건국과 천문령 승리는, 패망의 뒤안길에서 다시 국가를 세운 재건의 서사다. 그 서사는 특정 영웅의 무용담을 넘어,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묶어 공동의 안보·번영을 설계한 정치 기술의 총합이었다. 삼국의 잔영 위에서 남북국의 지평이 열렸고, 고려·조선·대한민국에 이르는 긴 계보 속에서 북방 인식과 개방 전략은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공급망, 안보, 기술 경쟁의 과제들 역시 연대·개방·조율이라는 원칙 위에서 해답을 찾는다. 698년은 과거의 한 해가 아니라, 위기 앞에서 다시 길을 여는 법을 가르쳐 주는 현재형의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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