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조선의 마지막 혁명을 말하다
1. 동학, 그 시작과 배경
1894년, 조선의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 한줄기 거센 움직임. 우리는 이것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씨앗은 이미 1860년대에 뿌려졌다.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신흥 민중 종교였다. 동학(東學)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라는 혁명적 사상을 중심에 두고, 신분과 차별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었다.
조선말,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탐관오리와 지주, 외세의 침탈까지 삼중고가 백성의 삶을 파고들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언어’였던 셈이다.
2. 1894년, 들불처럼 번진 농민군의 봉기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은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 그가 걷어들이는 전례 없는 세금과 착취에 농민들은 분노했고,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봉기의 선두에 섰다.
“백성들이 살 수 없다! 새 세상을 만들자!”
이렇게 시작된 고부 민란은 곧바로 전라도 일대, 나아가 충청도, 경상도로 번졌다. 농민군의 요구는 분명했다.
- 탐관오리의 숙청
- 신분제 철폐
- 토지의 공평한 분배
- 일본과 청나라 등 외세의 내정간섭 중단
이 네 가지 요구는 당시 사회구조를 뒤흔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동학 지도자들은 "보국안민(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을 외치며, 당시 조정에 백성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다.
3. 동학농민운동, 1차와 2차 봉기의 다른 결
운동은 크게 1차와 2차 봉기로 나뉜다.
1차 봉기에서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정부는 동학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어,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듯했다. 이때 전국적으로 '집강소(執綱所)'라는 농민자치기구가 운영되며, 실제로 부패관리를 쫓아내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하지만, 조정은 동학군의 힘을 두려워해 청나라와 일본군을 불러들이고 만다. 이 결정은 곧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2차 봉기는 상황이 달랐다. 일본군의 본격적인 개입과 조선정부의 강경 탄압으로 농민군은 전면적인 군사적 충돌에 내몰린다. 지도자 전봉준은 끊임없이 ‘외세 몰아내기’와 ‘나라 바로 세우기’를 외쳤지만, 일본군의 최신 무기 앞에 농민군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1894년 12월, 전봉준이 체포되고 지도부가 해산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린다.
4. 동학농민운동, 그 성과와 한계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는가? 결과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 운동이 조선의 역사, 더 나아가 근대 한국사에 끼친 영향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 신분제 붕괴의 촉매
동학농민운동은 신분제를 흔들었고, 이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성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각이 사회 전반에 퍼지기 시작했다. - 근대적 개혁의 발판
동학군이 전주성 점령 후 발표한 12개조 개혁안에는 신분 철폐, 토지개혁, 백성 권리 강화 등 근대적 개혁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 후속 개혁에서 이 아이디어가 이어졌다. - 일제강점의 단초
동학운동의 실패와 조선정부의 외세 개입 요청은 결과적으로 일본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 그리고 을사늑약과 한일병합까지, 이 모든 길의 시작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아픔이 남는다. - 민중 주체의식의 성장
동학은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구호를 실천했고, 이후 3.1 운동 등 민족운동, 현대의 민주화운동까지, ‘민중’이 역사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5. 우리가 잘 모르는 동학농민운동의 뒷이야기
- 여성 지도자의 활약
동학농민군에는 남성만 있었던 게 아니다. 여성 지도자 ‘김경천’과 무명 여성 농민들이 전투와 후방 지원에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많이 조명받지 못했다. - 집강소의 실험
전국 53개 집강소에서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이뤄졌고, 부패 관리의 축출, 무상교육, 진료 등 ‘민중을 위한 정책’이 시행됐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짧고도 강렬한 농민 자치의 경험이었다. - 동학군과 외세, 그리고 양반층의 타협
농민군 내부에서도 양반 출신 동학도와 평민, 노비 출신의 갈등이 존재했다. 동학이 처음부터 완전히 평등지향적이었던 건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 전봉준의 최후
그는 의연하게 “내가 죽더라도 백성은 살아야 한다”고 외쳤다. 그의 마지막 진술서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민중을 위한 지도자의 표상’으로 남아있다.
동학,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오늘날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히 ‘혁명’이나 ‘농민반란’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이 운동은 지금의 민주주의, 평등, 사회정의라는 가치를 미리 꿈꿨던 ‘미래의 역사’다. 특히, 경제적 위기, 양극화, 사회 갈등이 커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보여준 ‘연 대’와 ‘참여’,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가치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