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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개천절 금지령과 민족의 저항

 

 

일제강점기 개천절 금지령과 민족의 저항

개천절은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로,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날’을 기념한다. 오늘날에는 대한민국 국경일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 의미가 민족 자주와 독립정신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일본 당국의 강력한 억압 대상이 되었다. 1909년 대종교에서 공식 제정한 이 날은, 단순한 종교기념일을 넘어 민족 정체성 회복 운동의 상징이었다.

 

일제강점기 개천절 금지령과 민족의 저항

▶ 개천절과 일제의 불편한 시선

개천절은 대종교가 단군을 국조(國祖)로 모시며 민족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이를 예의주시했다. 단군 건국 기념일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조선이 독립된 나라였음’을 인정하는 역사적 행위였기에, 식민지 지배 정당성을 해치는 위험 요소로 간주됐다.

▶ 금지령의 공식화와 법적 근거

1910년 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모든 집회와 행사를 허가제로 운영했다. 경찰령 제14조와 집회취체규칙을 근거로, 정치적 성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종교·문화행사를 사전 금지했다. 개천절은 특히 ‘치안방해 우려 집회’로 분류되어, 허가 신청이 들어오면 대부분 불허됐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운동 열기가 높아지자, 일본은 개천절 금지 방침을 전국 경찰에 하달했다.

▶ 구체적인 탄압 사례

1925년 평양에서 대종교가 주관한 개천절 기념식은 개최 전날 경찰이 들이닥쳐 행사장을 봉쇄했다. 주최자 20여 명이 ‘불온 사상 유포 혐의’로 연행되었고, 준비해 둔 제단과 제물이 압수됐다. 1931년 함흥에서는 개천절 행사에 참석한 청년들이 일본 국기 게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국체(國體) 모독’ 혐의로 기소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서에는 “10월 3일을 기점으로 대종교 신자와 불온분자가 비밀리에 집회를 개최, 독립사상을 선전하므로 주의가 필요”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보고서는 개천절이 단순 종교의식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촉매제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 해외 한인 사회의 기념과 일본의 견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해외 한인 사회에서는 개천절 행사가 활발히 열렸다. 1920년대 만주 지역 독립운동 거점에서는 개천절을 맞아 무기 훈련과 군자금 모금이 병행됐다. 미주 하와이 한인 사회는 매년 개천절 기념 강연회를 열어, 청년들에게 민족사 교육을 실시했다. 일본 영사관은 이런 행사를 감시하기 위해 요원을 파견했고, 행사 참가자 명단을 수집해 본국에 보고했다.

▶ 비밀 행사와 상징적 저항

국내에서도 대종교 신자들은 비밀리에 개천절을 기념했다. 일부는 가정에서 단군상을 모시고 향을 피웠고, 학생들은 학교를 빠지고 산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 이런 활동은 경찰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으며, 적발 시 퇴학이나 투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 행사는 개천절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 언론 검열과 역사 왜곡

일본은 개천절 기사를 신문에 실을 수 없게 했고, 단군 건국 기사를 ‘전설’로 축소 보도하게 했다. 반면 일본 신화 속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국사 교과서에 비중 있게 다루며, 조선인의 역사적 자긍심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는 단군신화를 ‘허구’로 규정하는 식민사관 주입의 일환이었다.

▶ 광복 이후의 부활과 의의

1945년 광복 후 개천절은 즉시 부활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천절 금지령의 역사는, 문화와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당시 민족운동가들은 총칼 대신 의식과 기억으로 저항했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하늘이 열린 날을 자유롭게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맺음말

일제강점기의 개천절 금지령은 단순한 행사 취소 명령이 아니었다. 이는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부정하고, 식민사관을 강요하는 폭력이었다. 그러나 개천절은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 민족의 뿌리를 되새기는 날로 남았다. 이 날을 기억하는 것은 단군 건국의 신화를 넘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지켜낸 정신의 역사를 기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