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강화회의와 한국 독립운동 – 국제무대에 선 ‘조선’의 이름
1. 세계사의 전환점, 파리강화회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전쟁이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된 전쟁은 4년간 1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고, 종전 후 세계 질서를 재편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에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전쟁 승전국 대표들이 모여 전후 처리와 평화 조약, 국경 재조정, 전후 배상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시한 ‘14개 조 평화원칙’은 많은 식민지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지배받는 민족이 스스로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에게도 매력적인 명분이자 전략적 기회였다.
2. 3·1운동과 외교 전의 필요성
1919년 3월 1일, 조선 전역에서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른바 3·1 운동이다.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했고, 이는 곧 전 세계로 소식이 전해졌다. 독립운동가들은 이 기세를 이어 국제무대에서 조선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하려 했다.
특히 3·1 운동 직후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부를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목표는 분명했다. ‘민족자결주의’의 주창자인 미국과 승전국들에게 조선의 독립 필요성을 알리고, 국제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3. 김규식의 파견과 파리행
대표로 선출된 인물은 김규식이었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었고,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며,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외교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임명장을 받고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리에 출발했다. 경유지를 거쳐 어렵게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와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준비한 독립 청원서를 들고 회의장 주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4. 독립 청원서의 주요 내용
독립 청원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 조선은 역사적으로 독립된 민족이며, 일본의 한일병합은 불법이다.
- 일제 식민지배로 인해 정치적 자유, 경제적 권리, 문화적 발전이 억압당하고 있다.
-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
- 국제연맹의 보호 아래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보장할 것.
이는 단순한 외교 문건이 아니라, 3·1 운동의 정신을 압축한 선언이었고, 전 세계를 향한 조선 민중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5. 냉혹한 국제정세의 벽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의 현실은 냉정했다. 당시 승전국들은 일본을 전후 질서 유지의 중요한 동맹으로 보고 있었다. 이미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승인한 열강들이 이를 번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회의의 주요 안건도 유럽의 국경 조정과 독일의 배상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아시아 식민지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결국 김규식은 공식 회의장에서 조선의 독립 문제를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청원서도 공식 의제로 상정되지 못했다.
6. 비공식 활동과 언론 노출
비록 공식 절차에서 막혔지만, 김규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영국·미국 등 여러 나라 대표와 언론인을 비공식적으로 만나 조선의 독립 필요성을 알렸다. 일부 서구 언론은 그의 활동을 기사화했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도 등장했다.
이러한 보도는 국제 여론에 미묘한 변화를 만들었고, 이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외교활동을 지속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7. 역사적 의의와 한계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독립 청원 시도는 직접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국도 국제무대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첫 경험이었다. 또한 외교와 무장투쟁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확산됐다.
이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지에 대표를 파견하여 외교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파리에서의 경험은 훗날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제네바 등 국제회의에서 조선의 이름을 다시 울릴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8. 결론
1919년 파리강화회의와 김규식의 독립 청원은 실패한 외교사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 독립운동의 범위를 국내에서 세계로 확장시킨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비록 당장의 성과는 없었지만, 국제사회의 한쪽 구석에 ‘Korea’라는 이름이 각인된 순간이었다.
그 외침은 훗날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독립운동의 불씨로 이어졌고, 오늘날 우리는 그 노력의 가치를 기억해야 한다.